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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기능으로서의 Si(내향감각) - 강박과 집착Si Se_내향감각 외향감각 2023. 3. 4. 09:25반응형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에 따르면 mbti에는 8가지 기능이 있다고 한다. 이 8가지 기능은 크게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림자 기능"이라는 것은 무의식적 영역에 속하는 기능이자 mbti의 8가지 기능 중 가장 마지막에 속하는 기능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주기능(1차 기능), 부기능(2차 기능), 3차 기능, 4차 기능(열등 기능)까지만 봐도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의식적 기능들에도 관심이 많다. 이름 그대로 의식적인 부분이 아니라서 알아차리거나 나를 성찰하는 데 활용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정서적으로 안정돼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이 사람 앞에서 가면을 열심히 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선을 떨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대방 앞에서 고군분투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안정"은 나에게는 매우 거리가 먼 단어다. 나보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자기 확신이 있는 인프제라면 아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그렇지 않으니까...ㅋㅋ;; 충분히 잘 쓸 수 있는 2차 기능(Fe, 외향감정)이 가끔 오류가 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지나치게 자극 받고 기분이 좌우된다.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 유지를 잘 못한다고 할까. 또 능숙하게 쓰지는 못하면서 자주 쓰는 기능인 3차 Ti(내향사고)의 영향으로 인해 생각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다. 진짜...미치겠다. 왜 이렇게 생각이 많지?! 하면서 또 그 원인을 생각한다.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만족할 만한 내적 논리가 나올 때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래서 F적으로나 T적으로나 나는 내가 안정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느끼곤 한다.
그런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인프제의 그림자 기능인 Si(내향감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나는 준비물 챙기는 걸 진짜 못했다. 알림장에 메모를 해도, 잊지 않으려 속으로 여러 번 되뇌이고, 심지어 손바닥에 메모를 해도 까먹었다. 정신적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을 파악한다거나 챙기는 걸 잘하는 편인데, 물리적 영역에서는 영 잼병이었다. 엄마는 그런 내가 "넌 그 정신으로 어떻게 공부를 하니?"라는 말을 늘 하시곤 했다.
그러게요, 저도 쟤가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모르겠어요그리고 루틴한 걸 싫어한다. 규칙적인 것, 반복적인 것은 나에게는 전혀 흥미거리가 아니다. 규칙과 반복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최소한도로 필요한 만큼만 규칙과 반복을 행하고 싶어한다. 그 이상으로 루틴함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이지 기질에 맞지 않는다. 무언가를 새롭게 기획하는 것이 가장 흥미롭고, 조금 두렵긴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근데...반복적인 일은 정말 쥐약이다.nn년을 살면서 그나마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나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에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금방 싫증을 낸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려는 태도보다는 뭔가 갈아엎고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선호한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실수가 잦은 편인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기껏 서류 작성 잘 해놓고 양식에 맞추지 않아서 빠꾸 먹는 식...건망증도 심해서 내가 나 자신을 믿지를 못한다. 규칙, 반복, 안정성, 디테일함 - 이런 영역이 나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런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정확히는 이런 약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성격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애를 쓴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런 노력은 자연스럽지 않고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문서 하나만 작성하려고 해도 파일명이나 양식을 정말 수도 없이 확인한다. 버스표 같은 걸 예매할 때는 정말 진이 빠진다. 왜냐고? 날짜/소요 시간/배차 간격/요금/좌석 번호/취소 가능 여부 등 확인할 게 너무 많아서. 감각 기능을 힘들이지 않고 잘 쓰는 사람들에게는 일도 아닌 일들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갉아먹는 '일'이 된다. 확인을 두 세 번 하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대여섯번씩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도 나를 믿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한 게 맞는지 물어볼 때도 많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일, 하라고 하면 잘한다. 열심히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서 죽어간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장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이런 일상에서 안정감과 에너지를 얻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럽다.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일상의 루틴이 너무 지겨워 조금만 일상이 반복되어도 금방 에너지를 잃는다. 심지어 몸이 아픈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서도 책임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일을 열심히 반복한다.
내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 속에서 내 열등 Si는 마치 나의 본모습인양 일상 속에 자주 등장한다. 동료들의 자잘한 실수를 알아차리고 수정해주고, 안정성을 갖춘 사람인 것처럼 잔잔한 표정을 짓는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내게 부족한 현실 "감각(S)"을 어떻게든 끌어와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 디테일, 물성과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과 집착. Si는 내가 가장 자주 쓰는 가면과 같은 기능이다. 하지만 가면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고 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위태로운 기능이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가면을 매번 고쳐 쓰기 위해 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자기혐오나 무기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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