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제의 머리 속을 정리해주는 se(외향감각)의 힘
가끔 헷갈린다. 내가 인프제라 이렇게 생각이 많은 건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서 유형 검사를 하면 인프제라고 나오는 건지. 개인적으로는 사회생활과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바뀌는 '성격'과는 달리 타고난 '기질'은 바뀌지 않은 채 과일 속의 씨앗처럼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또 타고난 기질 자체가 성격을 특정 방향으로 추동해 나가는 면도 없지 않아 있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인프제 인간인 나, 생각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생각'만' 많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 머리 속은 온통 단기 계획과 장기 계획, 그리고 그것들을 매끄럽게 이루기 위한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차 있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마음은...내 마음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혼합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 눈앞에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면을 생각하고 가능성을 타진한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 내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 애써서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의 내용들은 '이미'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갖고 태어난 Ni(내향직관)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든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는 게 문제 상황을 발생시킨다. 외부 자극에 워낙 민감하고 원치 않아도 영향을 많이 받는 기질 탓에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살아가다보면 타고난 내향성이 극도로 강해진다. 외향성과의 불균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같은 내향인 3차기능 Ti(내향사고)를 Ni와 함께 엄청나게 쓰게 된다. 이른바 1-3차 루프(MBTI 기능 중 1차와 3차기능만 주구장창 쓰게 되는 매몰 현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분석과 비교에 탁월한 Ti가 내게는 3차기능이어서 그런지...손해와 일시적 실패를 요만큼도 감당하고 싶지 않은 쪼잔함으로 발휘되는 것 같다. 머리로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동시에 손해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미친듯이 다각도로 헤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적당히 계산하는 거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1-3차 루프에 빠진 상태에서 가동되는 Ti는 내게 한쪽으로 치우친(주로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무한정 보여준다. 심지어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일까지도 가능성을 키워서 생각하게 되고, 이런 흐름이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증폭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충분히 성숙하고 건강하지 못한 인프제여서 그런지, 나는 이 1-3차 루프에 꽤나 자주 빠지는 편이다. 루프라는 것이 참 답답하고 우스운 게, 루프의 내용인 1차+3차 기능에는 답이 없다는 게 자명한대도 계속 그 기능에 의존하게 된다. 내향인인 내가 과도한 내향성으로 인해 문제를 겪고 있는데 아무리 골똘히 내향적으로 성찰을 해봤자지. 그럴 때는 답이 하나밖에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외향성을 쓰는 것. 인프제인 나에게는 2차 Fe(외향감정)와 열등기능 Se(외향감각)가 그것이다.
물론 부기능인 Fe가 훨씬 쓰기 편하고 효과도 빠르다. 하지만 루프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억눌려 있던 Se가 고개를 들고 시위를 하기 시작한다. 몸 좀 챙기라고, 피곤하면 좀 쉬라고, 감각적인 즐거움도 좀 추구하라고, 일단 좀 도전하고 경험해보라고. 그럴 땐 그 말을 듣는 게 가장 좋다. Se가 폭주해서 먹고 자고 놀고 사람들 만나고 밖에 나가고...이런 것들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걸 다 내팽개치지 않도록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 시뮬레이션들을 잠시라도 좀 내려놓는 거다. 그러다보면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문제에 대한 답이 갑자기 팍! 하고 튀어오르기도 한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울적하고 찝찝했던 기분이 전환되기도 한다. (기분이 전환되어야 뭐든 새로운 마음으로 해낼 수 있기 떄문에, 기분이 전환되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기분이 바뀌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며 계속 괴로워하게 된다.)
최근 나는 노력해도 성과가 나지 않는 일들, 아무리 준비해도 다 대처할 수 없는 일들, 막막한 미래 같은 것들 때문에 우울과 분노에 휩싸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신을 다스리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보고 강의를 찾아 들어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고대하던 어떤 공연을 보러 가게 되었고, 그 공연에서 정말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ㅋㅋㅋ 놀았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준 건 아니고, 내가 그냥 엄청 신났다는 말이다. ㅎㅎ) 그러고 나서 정말 거짓말처럼 기분이 바뀌었다. 몸에 기운이 생기고 놓고 싶었던 것들을 다시 붙잡을 용기가 생겼다. 1-3차 루프에서 벗어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고 그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Se적 모먼트가 나를 살린 것이다.
가끔 Se라는 기능은 일종의 '돌파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모든 것들은 결국 지금-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채찍질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듯하다. 그럴 때는 한 번씩 시계 태엽을 돌려 초침과 분침, 시침을 다시 맞추듯 삶의 시간을 '현재'로 맞춰놓을 필요가 있다. 현재에 대한 강렬한 몰입을 불러오는 경험들, 나라는 존재를 충분히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신체활동들, 사람들 속에서 에너지를 주고받는 경험들이 필요하다. Ni-Ti적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행동으로 돌입해야 한다. 이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어떻게 귀결되든, 행동하고 나서 얻은 모든 것들은 데이터가 된다. 직관을, 용기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